나는 나 자신의 독자다 (야마다 에이미)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대표작 : 솔뮤직 러버스 온리, 풍장의 교실, 애니멀 로직, 슈거 앤 스파이스, 나는 공부를 못해
야마다 에이미 씨의 신간은 <주옥의 단편珠玉の短編>. 멋진 작품 11편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남녀의 우정부터 언어, 장편과 단편의 차이, 2차 창작에 대해서까지 충분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간 <주옥의 단편>은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11편 단편이 수록된 작품인데, 집필할 때 전체적으로 의식한 것이 있나요?
이번에는 '처음부터 말이 나오는' 단편집을 만들기 위해 말을 특히 의식했습니다. 제 소설에는 인간관계의 여러 에피소드나 장면을 골라, 그것을 말로 가득 채운다는 작품 등 여러 타입이 있습니다만, 이번엔 정말로 처음에 말이 나옵니다. 말이 제일 재밌는 도구라고 생각을 해서 썼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목이 먼저 제게 다가와서, 그 제목으로 말을 구사해 원고지 30장 세계를 어떻게 구축할까 하는 느낌이었지요.
--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을 받은 수록작 <생선 테루테루보즈生鮮てるてる坊主>는 제목과 내용 모두 인상 깊은 작품이었는데, 이 단편은 어떤 착상에서 탄생했나요?
<생선 테루테루보즈> 같은 경우는 제가 테루테루보즈를 보고 '이게 살아있으면 무섭겠다'는 감각을 느낀 게 처음이에요. 거기서 남녀의 우정이라는 요소가 나왔으니 어떤 은유로 그 제목과 사귀어 갈지를 생각하면서 말을 써갔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그런 공포스러운 결말에 다다른다는 건 저도 끝까지 몰랐어요. 처음부터 마지막 정경이 떠오른 게 아니라 마지막 장면을 쓰는 순간에 '아 이래서 이 제목으로 첫 줄을 썼구나' 하고 연결이 됐죠.
-- 신기하네요
단편소설엔 꼭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자각하지 못할 뿐 몸속에는 애초부터 마지막 장면이 들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이 쓰고 있는 사이에 점점 꺼내지고, 다 쓴 후에 깨닫는달까.
-- <생선 테루테루보즈>는 남녀의 우정을 다루지만, 야마다 선생님 자신은 성적 관계를 뛰어넘은 남녀관계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처음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부정한 열정이나 성적 어필을 느껴버린 이성과는 우정은 자라지도 성립되지도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걸 못 느끼는 데서 우정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뭔가 잘못되어 친구와 자버리는 경우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과 별개로 성적 이미지 밖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남녀관계는 분명 있습니다. 허나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해시키려고 해도 그건 몹시 어렵죠. 아마 영원히 어울리지 못할 거예요. 버릇과 같아 우리로서는 설명할 말이 없죠.
-- <생선 테루테루보즈>의 나미랑 니지코도 어울리지 못했죠. 꽤 어려운 문제네요.
니지코는 남편과 나미의 우정을 못 이해하는 자신에게 열등감을 가진 거죠. 내가 두 사람보다 약간 열등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건 아닐까. 남녀 사이 우정이라는 주제는 앞으로도 영원히 회자되겠지만, 저는 니지코처럼 남녀 사이의 우정이라는 개념이 없는 사람을 개념이 있는 사람이 신경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녀의 우정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겐 그게 깊은 질투와 미움을 낳는 원인이 될 수 있고, 그 결과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생선 테루테루보즈>의 결말이나, 신문 3면 기사에 실리는 사건이 일어나 버리는 거죠.
-- 확실히 그렇네요. 이어서 표제작 <주옥의 단편>에서는 주인공이 '주옥'이라는 말에 홀립니다. 야마다 선생님도 어떤 말에 홀려 정의를 파고들어 정의를 작품세계에 반영해 나가는 게 있나요?
작품도 그렇고, 일상생활에서도 한 가지 말을 재밌어하는 때가 꽤 됩니다. '이 표현이 진짜 글자 그대로의 의미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런 얘기에서 시작해 말을 장난으로 코팅해 나가는 놀이를 남편과 같이 많이 해요. '주옥'이라는 단어는 사실 제가 데뷔했을 때부터 아주 격한 섹스 이야기를 써도 게재지 목차에 '주옥의 단편'이라고 붙는 일이 계속됐어요. 당시엔 화가 치밀었지만, 경력을 쌓은 지금은 '그렇담 철저하게 주옥 같은 말을 가지고 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즐길 수 있게 되는 재미도 있죠.
-- <젠틀맨>(2011)도 한 가지 말의 정의를 밝혀낸 작품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젠틀맨>도 그랬죠. 말의 정확한 정의는 사실 하나일지도 모르지만, 현실에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니까요. 어떤 사람에겐 정확한 정의도 다른 사람에겐 다른 경우가 많을 수 있죠. <젠틀맨>에선 주인공에게 '젠틀맨'이란 어떤 정의일까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세상에서 인식되는 말의 정의와 다르게 쓰는 것이 소설가로서 솜씨를 보일 대목이라고 생각해서, 사람에 따라 어긋나는 말의 정의를 항상 신경 쓰는 부분이 있습니다.
-- 말의 정의도 말로 할 수밖에 없으니까 힘들죠
그렇네요. 전 수식은 잘 못하지만, 언어란 수학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명제에 대해 그 사람 나름대로 말을 수식처럼 점점 구축해 나가는 거죠. 그게 소설가의 개성을 형성해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이 작품에서는 사어도 몇 가지 픽업하셨습니다
그것도 제가 재밌어하는 것 중 하나죠. 죽은 말을 너무 좋아해서 일부러 씁니다. 죽은 말을 살려내서 철저하게 가지고 논다. 무덤 속 좀비를 끌어내는 것처럼(웃음). 좀비 영화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잖아요. 언어도 그런 식으로 새로운 종류의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 <사바랭 부인> 첫머리엔 브리야사바랭의 '어떤 것을 먹는지 말해봐. 어떤 사람인지 알아맞혀 주지'라는 아포리즘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작품에선 동경하는 사람과 같은 것을 먹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하는 주인공 소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식과 마음, 몸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볼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미국에선 남녀가 저녁을 먹고 나면 이제 당연히 침대로 가겠거니 하는 추세가 있듯이, 역시 음식이란 인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선 얼마든지 드라마를 할 수 있죠. 몸에 흡입한다는 의미에서는 섹스와 완전히 같으니까요.
-- 그렇군요
예전에 어느 아는 작가와 이야기하다가 음식을 철저히 쓰는 작가와 옷을 철저히 쓰는 작가가 나뉜다는 화제가 떠올랐어요. 특히 여성 작가는 그런 경향이 강하죠. 저는 음식을 쓰는 편이라 디테일을 다양하게 내지만, 주인공의 옷은 거의 쓴 적이 없어요. 반대로 주인공을 묘사할 때 옷을 쓰는 작가는 음식에 대해 잘 쓰지 않아요. 아까 남녀의 우정 이야기처럼, 거기엔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통하지 않기에 서로 감화하기도 하고 재밌죠.
-- 그 차이점은 뭘까요?
결국 음식을 쓸지 말지는 내장을 쓰고 싶은지 쓰고 싶지 않은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어로 내장을 뜻하는 guts(거츠)는 마음이라는 뜻도 있으니까요. 거츠를 쓰고 싶은지 쓰고 싶지 않은지. 스토리를 쫓느냐 안 쫓느냐보다는, 인간의 내면을 파헤쳐 소설을 쓰느냐의 차이 같습니다.
-- 나츠코는 와카츠키라는 남자를 맛보고 사람이 크게 달라졌는데, 어떤 맛이었는지 궁금했죠(웃음)
바보 같은 송이버섯(웃음). 나츠코의 경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소중히 생각해 온 것이나 믿어 온 가치관을 크게 바꿀 만한 상대를 만난 게 아닐가 생각합니다. 값비싸고 공들인 음식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바꿔주는 맛. 나츠코는 그렇게 아주 새로운,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맛을 알아 버렸죠. 그것도 일종의 맛이니까요.
-- <자기교>의 주인공인 미코가 설립한, 자기가 신과 교주와 신자를 겸임한다는 '미코쨩교'가 매우 독특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왔나요?
저는 '혼자서 어떻게든' 이런 걸 생각하길 엄청 좋아하거든요. 여러 가지가 자둥동체인 지렁이처럼 전부 혼자서 완결지으면 재밌지 않을까 싶거든요. 소설가도 어떻게 보면 '1인 종교'라면서요. 취재하는 것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니까요. 그렇게 전부 혼자서 세계를 구축한다는 걸 정말 제멋대로인 쾌락이라고 느낍니다. 그런 '혼자서 어떻게든'을 작품으로 하면 재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자기교>의 최초였습니다.
-- 미코는 격렬한 괴롭힘이 아니라 동정심을 받는 걸 견디지 못해 특수능력이 개안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불쌍해'라는 동정심으로 최후의 보루인 자존심이 파괴되는 건 가장 큰 굴욕이라고 생각해요. 그와 동시에 마지막 장면에서는 같은 말이 남녀 사이 쾌락의 장치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굴욕적인 장소에 내팽겨쳐지는 말과 가장 높은 쾌락으로 올려주는 말이 같은 '불쌍해'죠. 예를 들어 '바보'라는 말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굴욕이지만, 연인이 들으면 굴복하는 쾌락 같은 걸 느껴서 기분이 아주 좋잖아요(웃음). 말하는 사람에 따라 말의 뜻이 달라진다.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 '처음부터 말이 나온다'처럼 작품 11편 전체에 공통된 게 있나요?
하나의 말에서 에스컬레이트해서 멈추지 않는 거죠(웃음). 현실에 있는 이야기엔 전혀 개의치 않고, 전부 말로만 진행시켜 나가죠. 말은 이상함, 바보같음 말고도 동시에 사람에게 임팩트를 주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편집 전체에서 말이라는 게 이렇게 바보 같고 재미있고 중요한 여러가지 가능성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 단편과 장편을 쓸 때의 차이에 대해, 야마다 씨께선 일찍이 다른 인터뷰에서 '단편을 쓰는 것은 S의 기쁨일지도 모른다. 장편은 M의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번 단편집을 쓰실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나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네요. 말에 농락당하면서도 그 말을 농락하겠다는 느낌이었어요. <자기교>와도 엮일지 모르겠네요. '쓰는 건 나니까'라는 기분이었죠. 하지만 되튀김이라는 말도 있고, 결국 거기서 벗어나죠. 그런 것에 재미가 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 저희 북쇼트는 '동화, 민담, 소설 등을 바탕으로 창작한 단편'을 공모하는 기획입니다. 야마다 선생님은 이번 <주옥의 단편>에 사노 요코 씨의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모티브로 한 <100만 번 죽이고 싶은 허니, 스위트 달링>을 수록하셨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미친 사랑>을 바탕으로 <현자의 사랑>도 쓰셨습니다. 선행 작품을 기초로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게 '자기교'가 안 되니까 어려운 부분이긴 하네요. 리스펙트하면서 시비를 거는 고급 기술이 필요해요. 리스펙트에만 치중해도 싸움을 거는 것만 해도 안 되죠. 그 밸런스를 잘 맞추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썼습니다.
-- 균형 잡기가 어려울 것 같네요. 원작에 너무 끌린다거나
원래 작품을 따르려 할수록 내 안의 '나는 다르다'는 감각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걸 제대로 마주보지 않으면, 오마주를 하려다 오마주된 실패가 되어버립니다. 불손하단 걸 알면서도 절대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작품에 다시 한 번 숨을 불어넣겠다는 도전의 마음을 가져야죠. 제가 <현자의 사랑>을 쓸 때는, '다니자키 씨에게 싸움을 거는 정도로 써요'라고 담당 편집자에게 전했습니다. 그 정도로 진지하게 임하면, 져도 기분 좋은 마조히즘의 쾌락이 나옵니다(웃음). 승패는 관계없다고 생각하게 되죠.
-- 그럼 마지막으로 소설가를 꿈꾸는 분들께 메시지를 남겨 주시겠습니까?
책을 안 읽으면 안 되겠죠. 대부분의 일본인이 읽고 쓸 줄 알아서 착각하기 쉬운데, 트레이닝을 하지 않으면 소설을 쓸 수 없습니다. 스무살이 되고 나서 프로야구 선수나 발레리나를 목표로 하면 무리겠죠.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결국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생각은 초중학교 시절 독서량으로 결정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소설 세계는 80세 신인이 있어도 되는 세계죠. 구로나 나쓰코 씨처럼 70세가 넘어 아쿠타카와 상을 수상하는 사람도 있죠. 비록 트레이닝을 시작한느 것이 늦어도 몸과 마음의 유연성 체조가 잘 되어 있으면 거기서도 늦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몇 살까지 무얼 해야 한다는 제한이 없는 세상이니까요.
-- 확실히 그렇네요
그래서 신인들의 소설을 읽으면, 자기 작품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자기교>처럼 글쓴이 자신이 독자가 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나 소설 못 쓰는구나'를 알게 될 때가 와요.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죠. 데뷔 전 저는 서투른 독서소녀여서 제 자신이 서투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제자 첫 장만 한 몇 년을 계속 썼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독자로서의 제가 '이 소설이라면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한 장을 쓸 수 있었죠. 제가 글 쓰는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순간이 왔어요. 거기서 한 번에 100장을 썼어요. 다 쓴 게 신인상 마감 당일이어서 우체국까지 인생에서 제일 전속력으로 달렸죠(웃음). 그 작품이 데뷔작이에요.
-- <베드타임 아이즈>는 그렇게 태어난 거군요. 독자로의 자기 작품을 용서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년이고
아주 많이 쓰고, 아주 많이 읽지 않으면 거기까지 갈 수 없어요. 몇 살에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하지만 데뷔를 서두르는 사람이 많죠. 특히 젊을 때는 '데뷔만 하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건 아무 이득도 되지 않는다고 가르쳐주고 싶네요(웃음). 앞으로 기니까요. 10대에 대뷔해서 그후로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소수뿐입니다.
-- 그후로도 오래 써 나가는 사람과 한 작품으로 끝나버리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건, 수수께끼죠(웃음). 수수께끼. 왜 와타야 리사 씨는 와타야 리사대로 계속 써올까요. 그건 슬프지만 재능일지도 몰라요. 동시에 적합성과 부적합성도. 작가 특정을 지닌 사람과 지니지 못한 사람. 작가라는 생물이 된 사람과 되지 않은 사람의 차이 말이죠. 이건 어쩔 수 없어요(웃음). 모르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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